이순신 장군의 최초의 상륙전은 바로 웅포해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해전에서 최초로 상륙전을 전개한 ‘웅포해전’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지금까지의 해전에서는 출정을 하면 길어도 일주일 정도면 돌아왔는데, ‘옹포해전’에서는 어떠한 이유로 한 달 가까이 전투를 펼치게 되는 것일까요? 이 글을 통해 일본의 본진 부산을 공격하기 위해 반드시 옹포를 먼저 공격해야 했던 이유도 알려드립니다.


글의 순서


1. 웅포해전 위치 (지도)

웅포해전 위치(지도)
  • 웅포해전(음력 1593.2.10 – 1593.3.6) : 웅천/웅포(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

2. 웅포해전 과정 (5차 출정) : 해전상 최초의 상륙전, 3열로 함선 공격, 비격진천뢰(그림참고)

  • (1592.4.13) 임진왜란 발발
  • 1차 출정 : 옥포해전(1592.5.4), 합포해전(1592.5.7), 적진포해전(1592.5.8)
  • 2차 출정 : 사천해전(1592.5.29), 당포해전(1592.6.2), 당항포해전(1592.6.2), 율포해전 (1592.6.7)
  • 3차 출정 : 한산도 대첩(1592.8.8)에서 남해 제해권 장악 동시에 안골포해전(1592.7.10)
  • 4차 출정 : 부산포해전(1592.9.1) 적의 본진 부산포까지 승리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1592.5.4)부터 (1592.9.1)까지 4번의 출전을 통해 이순신과 조선 수군들은 일본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했습니다. 특히 일본의 본진 부산포가 조선에게 크게 공격을 당하고, 100여 척이 넘는 함대를 잃었다는 사실은 일본에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로써 일본군이 해상을 통해 민족이나 부대 또는 정치적, 경제적 세력이 서쪽으로 나아가는 ‘서진’을 막게 됩니다.

또한 (1592.9.1) 부산포해전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해안 해전 금지령을 내립니다. 이에 일본 수군은 부산포에 웅거하며, 조선 수군과 전투를 수개월간 회피하다가 1593년에 다시 서진을 준비합니다.

웅포해전 주요 왜성

그 준비로 일본은 부산포해전에서 입은 피해를 전력 보완하고, 울산부터 남해 쪽으로 엄청난 왜성들을 짓고, 이 왜성들 앞의 포구에는 수많은 함대들이 준비합니다. 이로써 조선 수군이 부산에 이르는 해로를 각 왜성과 포구에서 방어하며 감시합니다.

사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에 비해 병력과 전함의 수에서는 우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수군은 다시 부산포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며 100여 척의 전함과 1만여 명의 병력으로 부산에서 진해 웅천까지 진출해서 전진기지를 만든 것입니다. 또한 부산포에는 다시 일본 수군의 전함이 5백여 척이 대기하고 있고, 이들은 서쪽으로 진출하여 거제, 견내량까지 넘볼 것입니다.

조선 수군은 통영과 거제 사이의 좁고 긴 수로인 견내량(한산도 대첩)을 지켜야 일본군의 서진을 막을 수 있습니다. 여기가 뚫리면 한산도를 비롯해 통영, 고성, 사천 등 여러 포구를 동시에 막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시 임진년의 해전을 재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한편 이순신은 (1593.1) 조정으로부터 유서(임금이 내리는 명령서)를 받습니다. ‘평양이 조명 연합군에 의해 수복되었고 한양 앞까지 일본군을 압박하에 있다. 그리고 조명 연합군이 도망가는 적을 계속 추격하고 있으니 충무공도 해전으로 적을 무찌르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정은 이 기세를 몰아 수군이 다시 부산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무찌르기를 원했습니다.

임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기에 부산으로 출전을 결심하고, 5차 출정을 준비합니다. 전라우수영 이억기와 경상우수영 원균에게 연락하여 견내량(한산도 대첩)에서 만나기로 합니다. 이순신은 (1593.2.6) 여수 본영을 출발하여 사량도에서 하루 지내고, 견내량에 도착합니다.

먼저 도착한 원균은 36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이순신에게 (1593.2.7)에 함께 만나기로 한 전라좌수사 이억기가 도착하지 못했다고 화를 냅니다. 바로 옆이라 몇 시간만 노를 저어 도착할 수 있는 원균이 이순신 본영보다 먼 곳에서 출발하여 열심히 노를 저어 오고 있는 이억기에게 할 말인가요? 이것이 정말 화낼 일인가요?

실제로 전라우수영의 본진은 해남이라고 하나, 웅포해전 당시에는 신안에서 출발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신안에서 여수까지 오는 데만 5일 정도 걸리고, 칠천도 앞바다까지 오면 거의 10일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걱정은커녕 화를 냈다니 참으로 화가 납니다.

이렇게 (1593.2.10) 이순신은 전라좌수군, 전라우수군, 경상우수군을 포함해 총 89척의 연합함대를 이끌고, 견내량을 넘어 부산을 공격할 계획으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부산으로 가는 길목인 ‘웅포’에 일본의 전진 기지가 설치되어 있음을 파악합니다.

그곳은 해안가도 아닌 육지와 가깝고 아주 안쪽 깊숙이 위치하고 있었기에, 이 기지를 물리치지 않으면 부산 출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만약 ‘웅천기지’를 내버려 두고 부산을 공격했다가 웅천기지와 부산 양쪽에서 공격당할 수 있기 때문에 웅포를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웅포는 부산포해전 후에 이순신이 전쟁 준비를 강화하는 동안, 일본군들이 다시 집결하여 그들의 수군 기지로 설정한 곳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동쪽과 서쪽의 산비탈에 진영을 만들고 그 주변의 안골포, 제포, 거제도 그리고 가덕도 등지에 요새지를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한 곳이 공격을 당하더라도 서로 지원하고 방어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준비하였습니다.

(1593.2.10) 웅천해전의 1차 교전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웅천 포구는 위치상 너무 좁고, 웅포 전진기지(안골포 근처)에 왜성까지 만들어 놓은 상태라 공격이 쉽지 않았습니다. 공격을 하면 왜성에서 조총과 대포들을 쏘고, 웅포쪽은 함대가 정박해 있으니 안쪽 깊숙이 들어가 공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웅포 입구의 송도에 연합 함대를 매복시킵니다. 그리고 빠르고 가벼운 소규모 함선들을 교대로 옹포 안으로 진입시켜 화포로 왜선을 공격하고, 높은 곳의 일본군도 화포로 공격하여 사살합니다. 이렇게 일본을 공격하다가 왜선이 대거 추격해 오면 포구 밖으로 거짓 퇴거하여 유인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한산도 대첩에서 유인작전으로 크게 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포구 밖으로는 절대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조선 수군은 웅포 입구의 송도에 있다가 좁은 해역으로 밀물 때를 이용하여 함선 7, 8척씩 진입해서 함포 사격으로 전투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왜군은 산이라 고지대에 있고, 조선 수군은 20-30m 낮은 바다에 있기 때문에 배 위에 있는 조선 수군은 그 활동이 노출되어 왜군의 조총 사격 목표가 되고 불리했습니다. 이렇게 일본군들은 해전을 피하고 연안 방어 전투만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눈치만 보던 1차 교전은 큰 전과 없이 마무리됩니다.

(1593.2.12) 웅포해전의 2차 교전에서 이순신은 다시 유인작전을 시도했으나 큰 두려움을 가진 일본군들은 1차 교전처럼 응하지 않았고, 육지 진영에서 대응 사격만 합니다. 유인작전에 말려들지 않아 함포사격으로 육지의 왜적을 많이 살상했으나 전과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2차례의 교전 이후 이순신은 해전에 응하지 않는 왜적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중에 선조의 유서가 (1593.2.17) 한 번 더 내려오는데 ‘급히 적들의 돌아갈 길목으로 나가서 물길을 끊고 도망가는 적을 몰살하도록 하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육군의 강한 압박이 있어야 궁지에 몰린 왜적들을 바다에서 물리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수륙 합동작전의 필요성을 장계로 건의하고, 경상도 순찰사 김성일에게 합동작전을 요청하였으나 참가할 수 없다는 뜻을 전해옵니다.

어쩔 수 없이 (1593.2.18) 수군만의 단독 작전으로 웅포해전의 3차 교전을 합니다. 웅포 입구의 송도에 함대를 매복시키고, 웅천 포구로 깊숙이 들어가 공격을 한 뒤 유인작전을 펼칩니다. 드디어 유인작전에 걸려 10여 척의 왜선이 조선 수군을 쫓아 포구 바깥까지 나옵니다. 이때 송도에 매복되어 있던 함선이 돌진하여 왜선들을 공격하여 순식간에 5척이 격침되었고, 왜선들은 이를 보고 다시 포구 안으로 도주합니다.

승리의 기운을 가지고 포구 안까지 계속 공격하였고, 산에서 대응하는 왜적들에게도 집중사격을 합니다. 왜적의 피해가 상당히 컸으나 더 깊이 들어갈 경우 산에서 점령하고 있는 왜군의 공격에 조선군의 피해가 걱정되어 적절한 선에서 전투를 철수했습니다.

이어 (1593.2.20) 웅포해전의 4차 교전이 시작되었지만 전투 양상은 유사하게 흘러갔습니다. 왜적들은 육지의 진영에서 연안 방어 전투만 집중했고, 조선 수군의 유인작전에는 절대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지상에 있는 왜군과 배 위에 있는 조선수군과의 사격전이 전개되었고, 함선 간에 충돌이 발생할 정도로 바람이 크게 불어 전투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고로 이순신은 매 전투에서 사상자가 100명 이상 된 적이 없었기에 사상자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전략을 세웁니다. 이렇게 이순신은 유인작전을 포기하고 전 함대를 송도에 집결시켰다가 밀물 때를 이용하여 웅포 입구로 진입하고 왜선과 산위의 일본군에게 화포를 집중 발사합니다. 이러한 웅포해전은 (1593.2.10 – 1593.2.20)까지 4차례의 교전을 통해 왜적에게 상당한 피해를 가했으나 육군의 지원 없이 수군만의 전투로 웅포에 주둔한 왜적을 모두 섬멸할 수는 없었습니다.

웅포상륙작전 지도
웅포해전 상황도(출처 : 경상남도청)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유사한 형태로 웅포해전을 계속하기에는 너무 답답하여 이순신은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전략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상륙작전’! 비록 해전 중이지만 산에서 방어하는 왜적을 위한 방법인 듯합니다. 그래서 수륙 합공을 위해 육군 지원을 요청하지만 병력 부족으로 도와주지 못했고, 이순신은 단독 상륙작전을 실시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웅포 상륙작전‘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실시할 날짜 (1592.2.22)와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세웁니다. 전략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첫째, 모집하여 거느린 두 승려(삼혜 및 의능)와 의병장 성응지는 의병과 승려들을 이끌고 서쪽인 제포로 상륙한다.
  • 둘째, 3도의 전선 중 변변하지 못한 것을 골라서 동쪽인 남양리 쪽으로 상륙하게 한다.
  • 셋째, 3도의 수군 중에서 각각 5척씩 선발하여 15척으로 주력대를 편성하여 웅포로 돌진한다.
  • 넷째, 기타의 전선들은 주력대를 따른다.

이렇게 양쪽으로 상륙하여 세력을 분산시킨 뒤, 중간으로 웅천 왜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이러한 이순신의 활약으로 여기저기서 지략이 뛰어난 의병장과 스님들이 모여듭니다. 이때 조선 수군이 보유하고 있던 성응지의 의병과 심혜, 의승이 이끄는 승병 1700여 명을 동원하여 1100명을 동쪽의 남양리(안골포)에, 남은 600명을 서쪽의 제포(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각각 상륙시키기로 합니다.

그리고 경쾌선을 15척씩 조직하여 차례로 웅포로 진격한 후 공격하고 빠지기를 반복하기로 합니다. 즉 의병과 스님 부대들이 동쪽과 서쪽으로 상륙하고 세력을 분산시킨 뒤 정면 함대 공격으로 3면에서 일본군을 동시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

이처럼 먼저 일본군 세력을 견제 또는 분산시킨 뒤에 웅포의 저항력을 약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포구 안쪽 깊은 곳에 왜선을 공격하는 것이었고, 이순신의 빈틈없는 계획에 의하여 전투는 종일 계속되었습니다. 동서로 상륙한 의병과 승려, 사수들도 창과 칼을 휘두르고 활과 총으로 일본군을 닥치는 대로 무찌릅니다. 조선은 부상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조선 수군의 함포 공격만 대비하고 있던 왜군은 상상하지도 못한 상륙전으로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이렇게 일본군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에 조선 수군은 현자총통 등을 계속 발사했고 수많은 적을 사살했습니다. 웅포 일대에 집중 배치되었던 왜적들은 상륙부대의 공격에 동쪽의 제포와 서쪽의 안골포로 분산됩니다. 이 틈을 타 미리 준비된 15척의 경쾌선(가장 전투에 강하고 튼튼한 배) 배를 3열로 웅포 쪽 바다로 향하며 공격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15척의 조선 함대가 웅포를 공격하다가 2척의 조선 판옥선이 서로 부딪히게 됩니다. 저어야 하는 노도 부서지고 수군들도 구르는 등 전투태세가 아니었는데, 이때 갑자기 일본의 군사들이 달려들어 실제로 배 위에 올라타서 백병전을 전개합니다.

이순신은 지금까지 4차 출정까지 100명이 넘는 사상자가 없었는데, 조선 수군 130명 정도가 탑승하는 2척의 판옥선이 부딪힌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바로 옆에 경상우수사 원균의 판옥선이 있어 안심하고 있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원균은 모른 척하고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 황당한 일은 어찌 된 것일까요? 결국 이순이 장군이 노발대발하며 거북선을 앞세우고 나머지 판옥선까지 돌진하여 위험에 처한 판옥선 2척을 간신히 구출해냅니다. 그리고 다른 마음을 품은 원균의 본색은 다른 곳에서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웅포해전의 지난 4차례의 교전에 비해 월등한 성과를 거두며 전투는 마무리됩니다. 육군의 지원 없이 수군만의 전투로는 쉽지 않았으며, 자체적인 상륙부대로 큰 성과를 내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 중요한 것 중에 하나로 이 전투에서 의병, 승려, 사수 부대의 활약이 대단하여 이순신은 장계에 이들의 활약상을 자세하게 기록하게 됩니다. ‘의병과 승려들은 창과 칼을 들고 휘두르며, 혹은 활로, 혹은 총으로, 하루 종일 쳐들어가 싸워서 무수한 적들을 쏘아 맞혔습니다. 비록 왜적의 머리는 베지 못했으나 우리 편 군사로서 상한 사람도 없습니다.

(1593.2.22) 웅포해전의 5차 교전을 마무리한 후 연합함대는 칠천량으로 이동하여 재정비를 합니다. 1차 출정 옥포해전부터 4차 출정 부산포해전까지 길어야 일주일 남짓하던 출정 기간이 이번에는 16일째 지나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길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 첫째, 선조의 유서에 도망가는 왜군의 퇴로를 막으라는 지시가 있어 조명 연합군이 남하하여 왜군을 몰아낼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 둘째, 웅포의 왜군이 해상 전투에는 절대 대응하지 않고 연안방어만 하다 보니 완전히 격침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본진인 부산으로 안전하게 가기 위해서는 웅포 일대의 왜적을 물리쳐야 해야 했기 때문에 웅포 일대에서의 전투는 계속되었습니다.

(1593.2.28) 다시 출동하여 전투를 시도했으나 웅포 일대의 왜적들은 그대로 웅크리고만 있었습니다. 낙동강 하구까지 작전지역을 확대하여 산발적 전투가 이어지는 와중에 또 한 번 황당한 일이 발생합니다. 원균 지휘 하의 함선 2척이 전투에서 이탈하여 외딴섬에서 들락날락하는 모습이 포착됩니다.

확인 결과 왜적들이 해전에 계속 응하지 않으니 수급을 얻기가 어려워져, 원균은 섬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머리를 베어 전투 공로로 둔갑하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당시 조정에서는 전투에 대한 공로를 적의 수급을 베어 온 개수로 평가했기 때문에 공로에 눈이 먼 원균은 생각지도 못한, 있을 수도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현장에서 두 장수를 붙잡아 원균에게 보내자 원균은 오히려 화를 냅니다. 원균의 이러한 행동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첫 전투 옥포해전 때부터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바다에 떠다니는 왜적의 시체를 건져 수급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 지휘 하의 장수들이 용감히 싸워 왜선을 거의 격침시킬 때, 갑자기 나타나 전투 공로를 가로채기 위해 아군에게 활을 쏘았다고 합니다. 원균의 패악질은 점점 심해집니다.

비격진천뢰, 중완구
비격진천뢰(폭발할 때 하늘을 진동하는 소리를 낸다 하여 붙여진 이름. 장거리포의 한 가지로 화약, 철편, 뇌관을 속에 넣고 겉은 쇠로 둥글게 싼 폭탄으로 먼 거리에 쏘아 던져 터지게 함.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이장손이 발명함)와 중완구

이어서 (1593.3.4 -1593.3.6)에도 웅포해전의 전투가 매일 이어졌고, 특히 (1593.3.6) 전투에서는 육전에서만 사용하던 비격진천뢰(시한 폭발 투발 지뢰)를 중완구에서 발사함으로써 산에 있는 왜군들을 많이 사살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순신은 정박된 왜선을 불태우기 위해 화선을 준비했으나, 명나라군이 머뭇거리는 상황이라 왜선을 불태우면 왜군들이 최후의 발악을 할 수도 있어 작전을 중지했습니다.

(1593.3.10) 웅포로 출정한 지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으나 고대하던 육군의 남진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수군은 웅포를 공격한 지 1개월 만에 철수를 결정합니다. 1개월간 7차례에 걸친 전투로 적선 51척을 격침시키고, 적병 2500여 명을 사살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럼에도 웅포에는 여전히 많은 수의 적군이 산재해 있었고, 아군의 피로도 극에 달하였고, 전투에 필요한 탄약과 화약이 고갈되었습니다.

거기다 기다리고 있던 명나라 지원군은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남하는 고사하고 오히려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퇴각했으며, 농민들의 파종 시기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에 연합함대를 해체하고 전라좌수영으로 귀항하였습니다. 당시 전라도는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은 거의 유일한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파종 시기가 늦어진다면 향후 조선군과 백성들이 먹을 식량에 크나큰 타격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작전을 통해 웅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일본군을 완전히 섬멸할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의 유인작전으로 왜선이 바다로 나왔다면, 조선 수군은 바다에서 일본군을 일시에 섬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포구 깊숙이 배를 감추고, 조선 수군의 접근을 막고, 포구의 양쪽에 구축한 진영에서 조총을 발사하기에 조선 수군은 왜선에 접근하여 적을 무찌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일본 수군의 최전방 전진기지가 된 웅포 일대에 큰 타격을 가해 위협 요인을 상당 부분 해소했고 견내량을 넘보는 일본 수군의 의도도 좌절시켰습니다. 이순신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조선 함대를 철수시켜 한산도로 진을 옮깁니다.

웅포해전 종료 후 1593년에는 조선 수군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1593.8) 조선 수군 전체를 하나로 묶어 연합 함대를 편성하고, 통일된 작전을 펼쳐야 함을 인정해서 삼도수군통제사란 관직을 신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그간의 공을 인정해 전라좌수사 이순신 제독이 당연히 맡게 됩니다.

이는 조선 수군이 각 수영에 흩어졌다가 필요시 소집하고, 작전 후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비효율성을 제거하고 더 적극적으로 일본군을 압박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의 서진을 막고 견내량을 지키고자 그 입구에 조선 수군의 전진기지이자 연합함대 사령부를 설치하게 됩니다. 그곳은 바로 한산도 통제영.

한산도는 부산을 바라보았을 때 거제도 후방에 있는 섬으로 전라좌수군의 본영인 여수보다 부산에서 가까워 왜적을 견제하는데 유리했습니다. 그리고 부산에서 남해를 돌아 서해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요충지이고, 거제도와 견내량을 앞에 두고 있어 적의 기습을 방지할 수 있는 요지입니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진을 치고 차후 전투를 준비하였으며 추후에는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삼아 조선의 바다를 지키게 됩니다.


3. 웅포해전 결과

(1593.2.10 – 1593.3.6)동안 웅포해전의 7차례 전투를 걸쳐 다양한 전술과 새로운 전략으로 왜선 51척을 격침하고, 왜군 2500여 명을 살상했습니다.

그러나 겨우 조선 상륙군 1천6백으로 1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지키는 웅포를 탈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 과정에서 조선 함선이 좌초되는 바람에 처음으로 2척을 잃었습니다.


4. 웅포해전 특징 및 요약

  • 이순신과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웅천(웅포)에서 (1593.2.10 – 1593.3.6) 무려 한 달간 7차례의 접전을 펼친 끝에 일본군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해전.
  • 임진왜란 최초의 상륙전을 전개했던 해전.(육군 지원없이 단독 상륙작전 실시 : 의병과 스님 부대들이 동쪽과 서쪽으로 상륙하고 세력을 분산시킨 뒤 정면 함대 공격으로 3면에서 일본군 동시 공격함)
  • 웅포의 중심인 웅천읍성 일대 점령하지 못했고, 조선 전함이 좌초되어 피해를 봄
  • 일본의 전함 50여 척 격파, 2500여 명 일본군 사상자 발생

5. 그 밖의 이야기

  •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옥포해전, 당포해전, 한산도 대첩, 부산포해전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승리했고, 일본의 본진 부산포해전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원 아래 일본군은 재무장이 강화되어 낙동강의 수로를 이용해 호남 지역 내륙으로 진출하고, 해상으로 병진하기 위해 웅포 연안에 전선 115척과 1만 6천 명의 전진 기지를 설치하고, 부산포에는 다시 재정비하여 다시 500척의 함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 이순신은 일본 수군들이 부산포와 해안에 전력 보완되는 것을 지켜만 보았나요?


부산포에서 100여 척 이상을 격침했으나 너무 오랫동안 먼바다까지 해군들이 노를 저어서 이동함에 노역의 엄청남, 식량부족, 화약 부족 등으로 여수 본항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추수기인 10월에는 전라좌수영 군인들이 호남지역 추수기(농번기)에 투입되어야만 합니다. 당시 전라도의 식량이 조선 전체 군인들의 식량을 제공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따라서 추수기에 투입되는 것은 당연하고 곧 겨울이 되어서 바다에서 싸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 평안도에서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1593.1.9)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 선조는 이순신에게 유서를 보내며 부산으로의 출진을 장려합니다.

  • 혹자는 일본이 웅포해전에서 이겼다고 하는 말한다고 합니다. 그랬다면 산에서 웅크리고 연안 방어 전투만 하지 않고 바다로 나와서 당당하게 싸웠겠지요?? 무슨 근거로 그렇게 이야기하지는 모르겠습니다만…그렇다면 바다 쪽으로 나왔어야죠…숨어 있지만 말고요…

그리고 웅천왜성 총사령관인 와키자키 야스하루는 죽어도 이순신과 해전에서 전투를 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심지어 깊은 포구와 산에 숨어서 방어만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수군, 의병, 스님까지 힘을 합하여 50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왜군 2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웅포해전’은 조선 수군의 승리입니다.

  • 다만 웅천 왜성을 점령하지 못했고 웅포에 있는 일본군 전진기지를 완벽 격파는 하지 못했습니다. 조선 수군들이 이러한 왜성을 공격해서 이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일본의 왜성 축조기술은 엄청나다고 합니다. 왜성 자체가 단단하고 훌륭하기도 하지만 성을 빨리빨리 쌓아 올리는 것을 조선인들은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을 쌓는 것은 일본군들이 100년간의 전쟁 통해 본인들이 살기 위해서 어떻게든 성을 잘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은 농민들의 노역을 동원해서 성을 쌓은 반면에 일본은 수백 명씩 성만 쌓는 전문 기술자 집단이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일본인들이 부지런해서 성을 잘 쌓았던 것이 아니라 전문집단이 그만큼 성을 빨리 만들어내면 그만큼 보수를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일본이 왜성을 튼튼하게 잘 만들기에 조선 수군이 육전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깊은 곳에 숨어서 방어 전투만 하는 일본군이 답답하여 해전상 최초의 상륙전을 실시한 이순신의 전략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육군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실행한 상륙전! 동쪽과 서쪽으로 동시 공격하여 혼란스럽게 만든 다음 중간으로 포구를 공격하는 모습…상상만 해도 상쾌하고 통쾌한 기분이 듭니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 기술과 전략은 매번 다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 웅포해전에서도 기나긴 시간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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