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이 처음으로 출전한 해전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사천해전’에서 거북선 첫 출전과 학익진이 펼쳐지는 모습을 알려드립니다. 이 글을 통해 사천해전의 위치부터 과정, 결과, 그 밖의 이야기를 통하여 2차 출정의 승리를 알려드립니다.
글의 순서
1. 사천해전 위치 (지도)
2차 출정 : 사천해전 – 당포해전 – 당항포해전 – 율포해전
- 사천해전(1592.5.29) : 사천 앞바다
- 당포해전(1592.6.2) : 경상남도 통영시 당포 앞바다
- 당항포해전(1592.6.5) : 경상남도 고성의 당항리 앞바다
- 율포해전(1592.6.7) : 거제도 율포 앞바다
2. 사천해전 과정 (2차 출정) : 거북선 첫 출전, 학익진
사천해전 – 당포해전 – 당항포해전 – 율포해전
임진왜란 발발 후 이순신 장군은 첫 해전(1차 출정)으로 옥포해전에서 일본의 많은 함대를 수장시켜 첫 승리를 합니다. 연이은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은 많은 불안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아직 임진왜란 중이고 일본에서 대규모 선장이 나타났을 때 승리할 수 있을지 고민과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여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 군사들의 훈련을 더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첫 출정 해전>
그러던 중 경상도 서해 쪽에 왜선이 자주 출몰한다는 소식을 듣고, 혹여나 근처 전라좌수영까지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위험을 없애고 전라좌수영을 포함한 조선을 지키기 위해 다음 출정을 생각합니다. 2차 출정을 하려면 많은 함선이 필요하기에 이번에도 전라우수영 이억기에게 요청하여 (1592. 6. 3) 전라좌수영에서 모이기로 약속합니다.
그런데 약속된 출정 날짜에 앞서 (1592.5.27) 경상우수영 원균이 10여 척의 왜선이 사천 쪽에 나타나서, 노량 쪽으로 도망쳤다고 도와달라고 연락이 옵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도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이억기에게 글을 남기고 (1592. 5.29) 먼저 2차 출정을 합니다. 이순신이 출정하면 다른 경로로 전라좌수영을 공격할 수 있기에, 정걸 장군에게 전라좌수영을 부탁하고 출발합니다.
2척의 거북선을 포함한 23척의 판옥선을 준비하여 노량 쪽으로 가서 원균의 3척과 합류합니다. 그래서 함께 사천으로 가는 중에 1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사천 해협에 정박된 12척의 왜선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조선의 배가 다가가도 일본군은 어떤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사천에서 왜성을 짓기 바빴고, 배는 단지 왜성 공사 현장의 방어를 위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일본은 조선이 왔음을 알아채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당시 썰물이고 암초가 많은 장소이기에, 이순신 장군은 유인작전으로 후퇴합니다. 그런데 조선의 작전에 휘말려 왜선은 잠깐 따라 나오다가 멈춥니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은 상당한 거리에서 누가 먼저 나가지 않고 서로 대치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만조기가 되고, 사천 해협 쪽으로 밀물이 들어가는 것을 알아챈 이순신은 큰 소리로 외칩니다. ‘돌격 앞으로!!’ 그리고 처음으로 출전하는 2척의 거북선이 일본 쪽으로 돌격하기 시작합니다.
일본 총사령관은 2척의 거북선을 쉽게 보며,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 생각하고 조총 사격을 명령합니다. 역시나 단 2척의 거북선이 조총 사정거리(50m)로 들어오니, 일본은 조총 사격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공격하다가 거북선이 가까운 거리에 오면, 뚜껑이 덮인 판옥선 안에서 조선의 군사들이 뛰쳐나올 거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백병전을 준비하며 일본군도 배의 갑판 위에 올라와서 공격을 합니다. 그런데 거북선에 쏜 조총의 탄알이 자꾸 튕겨나가고, 배 아래쪽에 쏜 탄알도 소리만 나고 튕겨나갑니다. 참고로 조총의 사정거리가 50m이고 5cm 이상의 두께는 통과하지 못하는데, 거북선의 나무 두께가 15cm 정도가 되니 계속 튕겨나가는 탄알을 본 일본군도 의아했을 것입니다.
거북선이 점점 가까이 오더니 갑자기 용머리가 나와 대포를 발사합니다. 거북선의 용머리에서 나온 대포로 1척의 왜선을 바로 폭파시킵니다. 그리고 왜선들 사이를 용감하게 가로지르며 진격하는데 아주 무서울 것 없이 상대를 제압합니다.
그리고 백병전할 생각에 거북선 갑판 위에 올라온 일본군들은 깜짝 놀랍니다. 거북선의 거적에 20cm의 쇠못들이 박혀있는 줄 모르고 올라와 많은 피를 흘리고 다치게 됩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이순신은 판옥선 돌격도 외치며 함께 왜선을 격침해 나갑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왜선들을 격침한 후 왜선 1대만 남겨두고, 거북선과 판옥선은 후퇴합니다. 모두 격침할 수 있는데 1척의 왜선을 살려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조선 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살아 돌아간 일본군들이 육지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을 괴롭힐 것을 우려하여 차라리 배를 타고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백성을 위한 전략까지 생각한 이순신 장군!
사천에서 해전을 치르고 후퇴하여, 왜선 1척이 돌아 나올 것을 예상하고 모자랑포에서 밤을 지새우며 기다립니다. 예상대로 살아남은 일본군을 태워 나오는 1척의 왜선을 바로 폭파시키고 완벽한 승리를 합니다. 사천해전 승리!!
이번 사천해전에서는 상대와 거리가 너무 가까워 이순신은 총상을 입었음에도, 거북선의 위력을 확인하고 너무 기뻐합니다. 그리고 이순신 옆에 있던 군관 나대용, 이설, 이순신까지 부상 입었는데 이는 대장선도 멀리 있지 않고 함께 조총 사정거리 안까지 들어가서 전투했는 것입니다. 어느 지도자처럼 말로만 지시하지 않고, 함께 행동으로 몸소 직접 보여주신 참 리더 이순신 장군!!
이처럼 이순신이 사천으로 출발하기 전에 원래는 (1592.6.3)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2차 출정을 계획했었습니다. 그러나 원균이 급하게 도움을 요청하여 전라좌수영 병력으로만 (1592.5.29) 여수항을 출발해 노량 해역을 거쳐 사천 해역에 들어가기 전에 왜선 1척, 사천해전에서 11척 그리고 모자랑포에서 남겨둔 1척까지 총 13척을 격침했습니다.
사천해전 승리 후 경상우수영에 속하는 섬 사량도에서 잠시 머무르는데 주민들이 임진왜란 전쟁 후 조선 군인들을 처음 본다고 말합니다. 경상우수영 원균을 본 적이 없다? 그럼 어디에? 여러분들의 생각에 맡기겠습니다. 이에 주민들은 낮에는 농사, 저녁에는 서로 보초를 섰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조선군들이 오니 주민들은 너무 반가웠고, 모두를 기쁘게 맞이하며 밥과 술을 대접합니다.
이렇게 사량도에서 2일째 머무르는데 (1592.6.2) 당포에 왜선 21척이 정박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순신은 다시 출전을 결심하고, (1592.6.2) 모자랑포에서 바로 당포로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는 해안 쪽에 몇 척의 판옥선을 매복시킵니다. 이유는 후방에서 왜선이 공격해 들어오면 양측 왜선 사이에 조선배들이 포위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배들은 당포에 있는 일본군을 보자마자 바로 돌격합니다. 당포 바다가 수심이 깊고 암초가 거의 없어, 사천해전처럼 2척의 거북선만 앞으로 돌진합니다. 이때 굉장히 큰 안택선의 높은 누각에서 왜군 사령관 구루지마 미치유키가 거북선이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앉아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나를 죽일 수 있겠나? 날 과녁으로 삼아라?) 아니면 거북선의 위대함을 벌써 알고 겁을 먹고 있었을까요?
실제로 2척의 거북선이 구루지마 미치유키가 앉아있는 안택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습니다. 이때 순천부사 권준이 판옥선을 타고, 거북선과 같이 들어가 활을 쏘아 구루지마 미치유키를 죽입니다. 대장 권준을 따라 그의 부하들도 안택선에 뛰어들어 구루지마 미치유키의 목을 베어버립니다.
일본 수장의 죽음으로 부하들은 사기가 떨어지고 전쟁에서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선 21척을 격침하는 데는 어렵지 않았고, 사천해전 승리에 이어 당포해전도 승리를 합니다.
당포해전(1592.6.2) 승리 후 고둔포에서 머물면서 하루를 쉽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직 일본의 대규모 선단을 만난 적이 없었기에 여전히 조선 수군들은 불안했습니다. 그리고 (1592.6.4) 당포 쪽으로 나오는데 큰 선단이 서쪽에서 나타납니다.
연이은 해전이 시작될 거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바로 조선 전라우수영 이억기 선대가 나타납니다. (1592.6.3) 원래 먼저 만나기로 했던 이억기가 병사들과 큰 선단을 이끌고 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반갑고 마음이 벅차오를까요? 한편으론 해전이 아니기에 안도했을 것이고, 또한 서로 힘이 합쳐질 생각에 든든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이 연합하는데, 이순신 장군은 23척(거북선 2척 포함), 원균은 3척 그리고 이억기는 25척으로, 총 51척의 판옥선 연합 함대가 됩니다. (1592.6.5) 당포 해전 당시 후방에서 나타난 왜군이 거제도로 도망가 당항포 포구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연합 함대는 출발합니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당연히 이순신 장군으로, 그의 통솔력과 지휘력으로 연합 함대는 나아갑니다.
연합함대는 거제도를 돌아 옥포를 지나 당항포로 가는데, 바다가 너무 좁아 모든 배를 끌고 가기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2,3척의 판옥선만 들여보내고, 지형과 왜선을 파악하고 이순신은 당항포로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후방에서 왜선이 나타나 포위당할 수 있기에 판옥선 4척을 남겨두고 들어갔는데 26척의 왜선이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유인 작전으로 후퇴를 하는데, 마침 왜선도 따라나옵니다. 매복하고 있던 이억기 함선 근처에 왜선이 왔을 때, 이순신은 바로 배를 돌려 학익진을 펼칩니다. 이순신 장군의 전략으로 유명한 학익진! 배들을 학의 날개 모양으로 만들어 승리를 이끈 그 이름!
뒤에 일어날 한산도 대첩에서 유명한 전술로 알려진 학익진(학의 날개)을 이곳 당항포에서 먼저 펼칩니다. 매복하고 있던 이억기 함선도 학익진을 만들어 왜선들은 양쪽의 학익진으로 포위합니다. 바로 그때 이순신은 ‘거북선 돌격 앞으로!’라고 외칩니다. 적장이 타고 있던 안택선은 거북선에서 나온 포로 침몰하고, 왜선 26척 중 25척이 당항포에서 격침됩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1척의 왜선은 일부러 남겨둡니다. 왜군을 살려주기 위한 것이 아닌 오직 조선의 백성들을 위하여!! 그리고 조선군은 당항포에서 큰 바다 쪽으로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당시 당항포해전에서 큰 성과가 없었던 동명이인 무의공 이순신의 공을 세워주기 위해 명령을 합니다.
무의공 이순신은 외산리 근처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당항포 해전에서 살려둔 1척의 왜선이 분명 빠져나오면 무찌르기로 했습니다. 역시나 1척의 왜선이 나오는 것을 보고 무의공 이순신과 부하들이 격침시키고 왜군의 수장도 무찌릅니다. 이렇게 당항포 해전도 조선의 승리로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계획에 없던 원균이 갑자기 나타나 왜군들의 수급을 정신없이 베기 시작합니다. 무슨 상황일까요? 당시 왜군의 수급으로 쌀을 사기도 하고, 심지어 권력과 계급까지 얻을 기회를 만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병사들에게 늘 말한 것이 있습니다. ‘적의 수급에 매진하지 말고, 한 척의 배라도 더 불태우고 한 명의 왜군을 더 죽여라. 너희들의 공은 장계를 써서 낱낱이 밝힐 테니 전투 승리에 매진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균의 갑작스러운 왜군 수급에 이순신은 얼마나 답답하고 화가 났을까요? 실제 기록을 보면 원균의 수급 숫자가 이순신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그럼 장계를 본 임금은 어떻게 생각을 할까요? 과정이 아닌 결과로만 판단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이어서 (1592.6.7) 당항포에서 견내량을 지나다가 7척의 왜선을 발견했으나 율포로 도망가 버립니다. 왜군들은 살기 위해 육지로 향하지만 조선군의 화살로 왜적들은 물에 빠지고 모조리 섬멸됩니다. 소수의 왜선을 상대한 것이지만 이순신의 철저한 경계로 율포해전에서도 승리를 합니다. 혹시나 주변에 왜선이 숨어있는지 2일 동안 수색해 보지만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순신은 바로 부산 쪽으로 가서 왜군을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조선군들이 많이 지치고 식량, 화약 및 물품도 부족하여 해산하기로 합니다. 이렇게 (1592.6.10) 연합 함대는 미조항까지 가서 해단식을 가집니다. 전라우수영 이억기는 본부로, 원균은 경상도, 이순신은 여수항까지 돌아오면서 2차 출정은 마무리됩니다.
이순신의 2차 출정에서 4번의 연이은 승리는 임진왜란사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실제로 1차 출정으로 옥포해전 – 합포해전 – 적진포 해전에서 승리했을 때는 조선인조차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러나 2차 출정으로 사천해전 – 당포해전 – 당항포해전 – 율포해전까지 4번의 연이은 승리 소식을 듣고는, 육지로 도망간 지방관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조선군이 승리하면 도망간 자는 반역자가 되기에, 겁을 먹고 지방 관료들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도망갔던 군인들도 돌아와 농민들과 함께 의병 봉기를 여기저기서 일으킵니다. 이렇게 1, 2차 출정으로 7전 7승을 하여, 조선도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피폐된 조선에도 생기를 되찾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일본에서도 처음 1차 출정 시 3연패 했을 때까지만 해도 조선을 쉽게 보았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남해안에 왜성을 쌓고, 조선의 수군을 섬멸하고, 서해 바다로 가서 수륙 병진 작전을 실시하고, 조선 왕을 잡아라고 명령했었습니다.
그러나 2차 출정에서의 4연패까지 당하고 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과 접전을 금하라’라고 명령합니다. ‘조선 수군을 만나면 도망 가라’라고 명령하고, 일본의 유명한 수군 제독들을 모아 더 많은 함대를 만들어 부산으로 보내기 시작합니다.
3. 사천해전 결과
사천해전 – 당포해전 – 당항포해전 – 율포 해전 (1592.5.29 – 1592.6.10)
조선 | 일본 | |
함대 | 피해 없음 | 67척 격침 |
군인 | 사망 13명 | 사망 8000 – 9000명 |
지형과 조수를 이용한 전략 외에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참가하여 큰 성과를 거둔 해전입니다. 거북선은 각종 함포로 무장한 최전방 돌격선으로, 왜선 격침은 뿐만 아니라 일본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이후 거북선은 한산도 대첩을 비롯한 각종 해전에서도 조선 수군을 상징하게 됩니다.
4. 사천해전 특징 및 요약
-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의 2차 출정 : 사천해전 – 당포해전 – 당항포해전 – 율포해전
- 사천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을 통틀어 ‘사천해전’이라고도 부름.
- 사천해전 : 거북선이 처음으로 출전 (용머리에서 포 발사)
- 당항포해전 : 학익진 펼침
- 왜선 67척 격침, 일본군 8000-9000명 사망 vs 조선배 피해없음, 13명 사망
5. 그 밖의 이야기
- 사천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아 6cm 정도 살을 도려내어 총탄을 빼낸 후, 오랜 시간 후유증으로 괴로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는 적진에 조선인도 섞여 있어 아군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는 사실에 매우 분노했다고 합니다.
- <당포파왜병장> 기록에 의하면 왜선을 불태우거나 격침할 때마다 조선인 포로가 있는지 확인하라 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인 포로 1명을 구하는 것이 적의 수급 하나 베는 것보다 더 큰 공이라고 하였습니다.
- 당포해전에서 구루지마 미치유키를 죽이고, 그 자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준 금 부채를 발견합니다. 그 부채에는 ‘가메이 고레노리가 조선에 가서 많은 공을 세우면, 너를 오키나와의 왕으로 삼겠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금 부채에는 가메이 고레노리라고 이름은 적혀있었지만, 실제로 도쿠이 미치유키였다고 합니다.
- 이순신 장군은 해전 중에 사망한 군사 시신을 수습하여 나룻배에 싣고, 고향 가족에게 인계하고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유족들의 생계를 마련해 주기까지 합니다. 조선을 위하여 싸워 희생한 군사 한 명에게도 끝까지 책임지고 위로를 전달합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군사들은 이순신을 더 믿고 따르게 되었고, 또한 목숨 걸고 싸울 용기가 났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해전에서 조선에게 패한 일본은 과연 다음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을 이길 수 있을까요? 더 큰 실패를 당하게 될 일본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순신 장군과 병사들의 멋지고 통쾌한 해전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글을 통해 이순신 해전 순서 및 과정을 알고 이순신 장군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지셨기를 바랍니다.
<이순신 해전 전승전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