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제해권을 장악한 바로 그 ‘부산포해전’

임진왜란 해전에서 100척 이상의 왜선을 침몰시킨 해전을 아십니까? 작전상이 아닌 파상 공격으로 후퇴를 처음 한 해전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곧바로 일본의 본진인 부산포를 공격하여 큰 승리로 이끈 해전의 과정과 전술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글을 통해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대첩 이상으로 큰 승리를 했다고 자부하는 부산포해전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글의 순서


1. 부산포해전 위치 (지도)

4차 출정 : 장림포해전 – 화준구미해전 – 다대포해전 – 서평포해전 – 절영도해전 – 초량목해전 – 부산포해전

부산포해전 (4차 출정) 지도
  • 장림포 해전(1592.8.29) : 경상도 동래부 장림포(현, 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 화준구미 해전(1592.9.1) : (현, 몰운대 인근)
  • 다대포해전(1592.9.1) : (현, 다대포 해수욕장 인근)
  • 서평포해전(1592.9.1) : (현, 송도 해수욕장 인근)
  • 절영도 해전(1592.9.1) : (현, 영도 남항대교 인근)
  • 초량목해전(1592.9.1) : (현, 부산항 국제 여객 터미널 인근)
  • 부산포해전(1592.9.1) : 부산포

2. 부산포해전 과정 (4차 출정)

장림포해전 – 화준구미해전 – 다대포해전 – 서평포해전 – 절영도해전 – 초량목해전 – 부산포해전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여수에서 1차 출정으로 옥포해전(1592.5.7), 합포해전(1592.5.7), 적진포해전(1592.5.8)에서 승리를 합니다. 이어서 2차 출정으로 사천해전(1592.5. 29), 당포해전(1592.6.2), 당항포해전(1592.6.5), 율포해전(1592.6.7)에서도 승리를 합니다. 그리고 3차 출정으로 한산도대첩(1592.7.8), 안골포해전(1592.7.10)으로 연이은 승리로 지금까지 9전 9승 완승입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상대방도 이제 맞서기 두려울 것입니다.

이렇게 조선의 계속된 승리로 바다의 분위기와 임진왜란의 기운도 바뀌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가덕도와 거제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방어선이 생겨서, 그 방어망 안으로는 단 1척의 왜선도, 1명의 왜군도 들어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제해권 장악으로 남해가 이순신 장군과 조선의 바다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다를 장악한 분위기였음에도 여수로 돌아온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끝나지 않았기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육지에서의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지켜질지, 일본 육군이 전라좌수영을 공격한다면 조선 수군이 육전에서 이기기에는 쉽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황진 장군이 웅치 전투(1592.7.7)와 이치 전투(1592.7.8)에서 승리를 하여 전주가 지켜졌고, 의병장 고경명, 조헌 그리고 영규가 전라도 금산을 버티어 주어 일본이 더 이상 전주를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남쪽을 통해 전라도를 공격하려 했으나 당시 경상도 의병장 정인홍, 김면, 곽재우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피난 간 임금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게 일본의 본진인 부산을 공격하라고 무리한 명령을 내립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의 연이은 승리에 패잔병들과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군인 수도 많아지고 더 많은 판옥선을 만들어 조선 수군도 강화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자신감을 가진 이순신 장군은 전라도 육지가 안정화된 것을 확인하고 왜군 본진(부산포)을 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이렇게 준비된 상황에서 이순신은 부산포 공격을 위해 전라우수영 이억기를 계획된 날짜보다 서둘러 (1592.8.1)에 부릅니다. 그리고 (1592.8.23)까지 전라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이 부산포 해전을 위해 실전처럼 합동훈련을 합니다. 일본 본진인 만큼 철저하고 확실하게 계획하고 준비합니다.

(1592.8.24) 드디어 4차 출정으로 이순신과 이억기는 여수항을 출발하여 사량도에서 원균을 만납니다. (1592.8.25) 당포에 가서 하루 머물고, (1592.8.26) 거제도 앞바다까지 가서 상황을 살핀 후 (1592.8.27) 견내량을 나가 안골포 근처에 도착합니다.

조선은 74척의 판옥선, 90척의 협선이지만 일본 본진에는 500여 척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차근차근 거의 4일이 걸려 부산 가까운 곳까지 오게 됩니다. (1592.8.28) 드디어 보이지 않는 방어선인 가덕도를 넘어가는데 근처를 지키고 있던 왜선들이 조선 수군을 보자마자 도망을 갑니다.

한산도 대첩 후에 바다에서 조선 수군과 교전을 금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도 있었지만, 왜군은 두려움과 공포로 그냥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도망가는 왜선을 낙동강 하구부터 공격을 시작하는데 낙동강 하구쪽 장림포 해전(1592.8.29), 화준구미 해전(1592.9.1), 다대포해전(1592.9.1), 서평포해전(1592.9.1), 절영도 해전(1592.9.1)에서 승리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작은 해전에서 몇 척의 왜선들을 격침하면서 총 24척 정도 수장시킵니다.

그리고 첩보선을 통해 부산항에 470여 척의 왜선을 확인했고, 육지에는 왜선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의 천자총통, 현자총통을 포함한 많은 무기들이 배치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이를 확인한 조선은 공격이 쉽지 않은 상황임을 알았기에 더욱 철저하게 전략을 시행해야 함도 알았습니다.

실제로 부산포는 임진왜란에서 일본 본진이고, 일본 나고야 사령부와 계속 연락을 취하는 곳입니다. 이렇듯 일본의 중심축을 이순신에게 빼앗기면 평양, 함경도까지 진출한 육군 부대들도 돌아갈 곳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부산포를 지켜라!’라고 할 정도로 절실했습니다. 당시 모든 군대를 지휘하는 참모장 이시다 미쓰나리는 육지에서 참전 중임에도 부산 방어 명령을 내립니다. 그 당시 10가지 방어 명령을 내렸던 기록을 몇 가지 적어보았습니다.

  • 근해에서 적을 발견하기 전이라도 적 선단의 부산 쪽 기동이 확인되면 남해안 일대의 모든 선단을 부산으로 집결시킬 것.
  • 조선 대포를 최대한 확보하고 그 사격법을 익혀 둘 것.
  • 적을 최대한 끌어들여 싸우고 거북선을 타격하는 데 집중할 것. 적의 사령선에 대한 타격이 가능하다면 역시 집중 타격할 것.
  • 선상의 병력을 정예화하고, 그 병력은 화공에 대비한 화재진압조와 저격조로 편성할 것.

당시 부산에는 일본 사령관인 구키 요시타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도도 다카토라 등 최고의 수장이 모여있었음에도 참모장의 방어 명령까지 있었으니 그만큼 절실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심장부였던 조선의 부산을 되찾기 위해서 조선군은 부산포로 출동합니다.

조선군은 부산포로 진격하는 2가지의 길로 나누어 진격합니다. 이순신과 원균은 부산 육지와 절영도 사이 초량목을 통해 진격하고, 이억기는 절영도를 우회하여 부산으로 직접 진격하기로 합니다. 적선 470척을 어떻게 상대하고 무찌를지 긴장되고 걱정되지만 새로운 전략과 전법으로 승리할 기대를 가집니다.

먼저, 이순신과 원균 함대가 초량 앞바다에 도착했을 때, 이곳을 미리 지키고 있던 4척의 왜선인 세키부네가 조선 함대를 보고 돌진합니다. 왜군 본진(부산) 근처였기에 이순신도 긴장을 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4척의 세키부네(왜선)는 돌격해오는데 배의 군사들은 모두 바다에 뛰어내려 수영하여 육지로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일본 수군은 조선은 너무 강한 상대라는 것을 알고, 조선 함대를 보고 도망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찌감치 거북선과 조선 함대를 상대로 싸울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배를 돌려 도망치려니 뒤에서 사령관들이 보고 있어 결국 배만 돌격시켜고 싸우는 척을 하며, 군사들은 도망간 것입니다. 이렇게 조선 함대는 4척의 왜선을 아주 쉽게 침몰시켜 초량목 해전(1592.9.1)에서 승리를 합니다.

좁은 초량목을 지나 부산 앞 바다로 집입하여 거북선을 먼저 출격시키는데, 일본의 거센 공격으로 함포뿐만 아니라 조선의 무기인 편전(애기살)도 날아옵니다. 조선인들만 쏠 수 있는 작은 화살인 편전을 순왜인(일본에 협력하는 조선인)들이 거북선을 향해 거침없이 쏘아댑니다.

각종 무기들로 인한 적들의 거센 공격으로 이순신은 후퇴 깃발을 올립니다. 해전 이후 작전상 후퇴가 아닌 파상 공격으로 인한 후퇴는 처음입니다. 그리고 전선에서 벗어나 조선 사령관들은 회의를 합니다. 경상우수사 원균, 조방장 정걸, 전라우수사 이억기까지 모두 후퇴하고 후일을 기약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녹도만호 정운은 일본의 기를 세워줄 수 없다고 다시 공격하자고 합니다. 이순신은 정운의 뜻을 받아들여 후퇴 없이 부산포 공격을 다시 명령합니다.

부산포 장사진

초량목이 좁았기에 1척의 거북선을 선봉으로 장사진을 전개하여 들어가고, 이억기 부대도 1척의 거북선을 앞세워 장사진을 전개하여 진격합니다. 2척의 거북선이 적을 향해 진격하니 왜군들은 거북선에 집중 사격을 하고, 이때 거북선은 방패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다의 면적이 좁기에 조선의 판옥선들은 넓은 학익진이 아닌 6개의 작은 학익진을 전개하여 먼바다에서 ‘일시집중타‘를 시작합니다.

조선 판옥선의 일시집중타 공격으로 일본 함선이 마구 부서지니, 왜군들도 조선의 화포를 이용하여 먼바다의 조선 함선을 쏘아댑니다. 이때 거북선은 일부러 더 가까이 접근하여 조준사격을 해버립니다. 일본군들은 조선 함대의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부산포 교란작전

이렇게 거북선과 판옥선의 교란 작전으로 왜선 100여 척을 쳐부숴버립니다. 그 와중에 조선의 판옥선은 단 1척도 침몰하지 않습니다. 적선의 수가 너무 많아 전멸시키는 것은 어려웠고,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로 날이 저물었기에 함대를 물려 가덕도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부산포해전의 승리를 마치게 됩니다.

작은 해전부터 부산포해전까지 거의 10시 동안 전투에 임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정말 가슴이 뜨거워지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이렇게 조선군의 완벽한 승리로 총 120여 척을 격침시키고, 남쪽 바다의 장악권은 이제 조선 수군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부산포 해전 승리

3. 부산포해전 결과

장림포해전 – 화준구미해전 – 다대포해전 – 서평포해전 – 절영도해전 – 초량목해전 – 부산포해전 (1592.8.29 – 1592.9.1)

조선일본
병력판옥선 74척, 협선 92척470여 척
피해함대 피해 없음
정운 등 6명 사망 , 25명 부상
군함 128척 격침
5000여 명 사상

부산포해전에서 조선군의 사상자가 31명으로 옥포해전, 사천해전, 한산도대첩에 비하면 큰 피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조선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일본 본진 부산포를 공격해서 꼭 이겨야만 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일본의 심장부인 부산을 공격함으로써 남해안의 제해권이 모두 조선 수군에게 있음을 알리게 됩니다.

“왜선 100여 척을 여러 장수들이 힘을 합해서 두들겨 부순 후, 화살을 맞아 죽은 왜적들을 토굴(참호) 속으로 끌고 들어간 자가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는데, 배를 깨뜨리기에 바빠서 머리는 베지 못했습니다.”


4. 부산포해전의 특징 및 요약

부산포해전
  •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의 4차 출정 : 장림포해전 – 화준구미해전 – 다대포해전 – 서평포해전 – 절영도해전 – 초량목해전 – 부산포해전
  • 작전상이 아닌 파상 공격으로 후퇴를 처음 한 해전(다시 공격하여 승리함)
  • 병력 : 100여 척(조선) vs 500여 척(일본)
  • 일본의 중심축 부산포 공격
  • 부산포해전 : 장사진과 6개의 작은 학익진(지형상), 거북선과 판옥선교란작전
  • 조선 함대 피해 없음 vs 왜선 128척 격침
  • 조선 수군의 남해 제해권 장악

5. 그 밖의 이야기

  • 일본군 최고 사령관인 도요토미 히데카츠(일본 최고 권력가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도 큰 충격을 받습니다. 당연히 쉽게 조선을 무너트리고, 일본으로 금의환향할 것이라 생각하고 조선에 왔지만 제대로 된 해전을 겪어보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조선 함대의 엄청난 공격을 겪은 후 불안감에 지내다가 얼마 후, 화병이 나서 죽었다고 합니다.
  • 부산포해전으로 일본 수군 활동은 잠잠해졌고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합니다. 이렇게 부산포 공격을 받은 후에 일본군은 더 이상 해상 작전에 나서지 않았고, 큰 패배를 한 일본은 정유재란 때는 전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됩니다.
  • 부산포해전 중에 이순이 장군이 가장 아끼는 장수 정운을 잃게 됩니다. 후퇴 후에 다시 공격해야 한다고 했던, 그래서 승리를 이끌게 해준 녹도만호 정운. 선봉장으로 활약하다가 일본군이 쏜 대조총으로 이마를 관통하여 결국 눈을 감게 됩니다. 정운 장군의 장례를 치르면서 이순신 장군이 정운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추모시를 올립니다.
녹도만호 정운 추모시

녹도만호 정운은 사령관인 전라좌수사 이순신보다 두 살이 많았고, 무과 급제도 이순신보다 6년 빨랐으니 인생 선배이자 군문의 선배입니다. 그럼에도 정운은 부임 1년 만에 녹도를 ‘전쟁 준비 태세를 가장 완벽히 갖춘 수군진’으로 만들었으니 이순이 가장 신뢰하는 참모였습니다.

  • 부산 시민의 날 – 10월 5일

조선의 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해 승리를 거둔 10월 5일은 ‘부산 시민의 날‘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해전 승전일(음력 9월 1일)을 기념해 1980년에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5일로 ‘부산 시민의 날’이 지정됩니다. 부산포해전에서 보여준 선조들의 굳센 정신을 이어받아 이순신 독후감 공모전 시상식을 통해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기도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였을 때, 이순신 장군이 부산 앞바다에서 왜선 100여 척을 격파한 부산포해전은 대단한 역사적인 일임을 알고 간직해야 합니다.


100여 척을 이끌고 상대 500여 척을 상대한다는 것은 심리적 압박감도 상당하고 상상조차 힘든 일입니다. 거기다 일본의 중심축에서 조선의 무기까지 사용한 거센 공격으로 처음으로 후퇴를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다시 공격하여 128척의 왜선을 격침시킨 것은 앞서 한산도 대첩만큼이나 대단한 전투였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가능한 일인지 믿기 어려울 만큼 부산포해전 또한 영화로 만들어도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열광의 도가니가 될 것입니다.


옥포해전…1차 출정으로 첫 승리를 이끌다!
거북선이 첫 출전한 이순신 장군의 사천해전???
역사상 3대 대첩 중 하나 바로 한산도 대첩!!!
이순신 장군의 최초의 상륙전은 바로 웅포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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