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명량’ 영화에 이은 또 하나의 흥행작 ‘한산’ 영화를 보셨나요?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대단한 해전이고, 대중들의 관심 또한 많기에 한산도 대첩에 대해 좀 더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이 글을 통해 해전이 대첩으로 된 이유, 해전 과정, 전략 및 그 밖의 이야기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글의 순서
1. 한산도 대첩 위치 (지도)
- 한산도 대첩(1592.7.8) : 한산도 앞바다
- 안골포 해전(1592.7.10)
2. 한산도 대첩 해전과정 (3차 출정) : 학익진, 거북선 출전, 천자총통
한산도 대첩 – 안골포해전
(1592.4.13)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1592.4.28) 경주에서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하고, 임진왜란 발발 20일째 (1592.5.3) 왜군에 의해 수도 한양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임금 선조는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한양, 개경, 평양, 의주까지 갈 수 있는 곳까지 도망을 갑니다.
어찌 백성과 나라를 버리고 임금이 도망 간단 말입니까? 믿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고, 믿기에는 마음이 몹시 고통스럽습니다. 당시 백성의 그 마음을 감히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이렇게 통곡하는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이순신 장군은 바다에서 싸우고 또 싸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임금에게 버림받은 조선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여수항에서 1차 출정으로 옥포해전(1592.5.7), 합포해전(1592.5.7), 적진포해전(1592.5.8)에서 승리를 합니다. 이어서 2차 출정으로 사천해전(1592.5.29), 당포해전(1592.6.2), 당항포해전(1592.6.5), 율포해전(1592.6.7)에서도 연이은 승리를 합니다. 이렇게 백성과 나라를 위해 싸우고 애쓰는 이순신과 군사들을 보며 백성들의 통곡소리가 조금이나마 가라앉아졌으면 하는 바랍니다.
1차 출정에서 3전 3승에 반신반의하던 백성들도 2차 출정에서 4전 4승까지 모두 승리를 하니 백성들도 조금씩 힘을 얻은 듯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도망갔던 지방 관료들, 군인들도 돌아오기 시작하고 백성들과 의병 봉기를 일으켜 함께 싸우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과 군사들의 희생과 용기로 백성들도 함께 용기를 얻는 듯합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일본이 쉽게 승리할 거라 생각했고, 1차 출정에서 일본이 패한 것을 크게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차 출정에서도 일본이 조선에 크게 패하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새로운 계획을 구상합니다. 그래서 일본 수군의 최고 권위자이자 세계 야망을 품게 해준 구키 요시타카를 부릅니다.
구키 요시타가는 일본의 모든 함대가 그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될 만큼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고, 수군 제독으로 큰 업적을 세웠습니다. 그런 그도 이순신 함대와 병력의 수를 2배 지원해 주면 이순신을 상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조선의 함대와 수군의 수가 비슷하면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만큼 그 당시 이순신 장군의 대단함을 알고 조심스러웠던 것이 아닐까요? 신출귀몰한 전술 능력, 거북선의 위력, 다양한 무기들 그리고 군사들의 패기와 용기가 일본의 패배 원인으로 파악했을 것입니다. 조총으로 백병전을 하는 일본 입장에서 조선의 위력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용인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해적 출신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부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순신을 무찌르라는 명령에, 육지 전투처럼 해전에서도 당연히 승리를 확신하고 겁 없이 움직일 인물입니다. 자신감으로 가득 찬 그는 해전에서 어떻게 싸워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아래에서 알려드립니다.
당시 부산 쪽에 70척의 일본 전함이 있었고, 전진 기지에서 70척의 배를 더 보내어 일본은 약 140척의 함대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1592.7.4)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만나 하루 종일 지형 분석 등 치밀한 전략을 세웁니다.
(1592.7.6) 노량에서 원균과 만나 대략 60척의 조선 연합 함대가 3차 출정을 시작합니다. 창신도에서 하루 머물고, (1592.7.7) 당포에서 저녁을 보내는데, 거제도 북쪽 바다의 견내량에서 왜선 79척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음 날 (1592.7.8) 오전 견내량 쪽으로 가보니 정말 왜선이 대략 70척이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은 와키자카 야스하루도 조선 함대 60척 정도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승리에 확신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함께 온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마키의 말은 듣지 않고, 자신감에 가득 차 승리에만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견내량 해협은 너무 좁고, 암초도 많아 큰 판옥선으로 진격하기 어려워 이순신은 유인 작전을 펼칩니다. 견내량으로 가서 싸울 수 있지만, 백성들을 위해서 이순신 장군은 전략상 직접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견내량에서 싸우다 일본이 지면 왜군들이 거제도와 통영으로 도망가 육지에 있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또한 숨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살아서 육지 쪽으로 가더라도, 무인도인 화도나 한산도에 들어가서 굶어죽일 작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나와서 수장시킬 작전이었습니다. 바로 앞만 보지 않고 멀리 넓게 보는 안목은 인생에서도 꼭 필요한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략상 이억기 부대는 통영 쪽에, 원균 부대는 화도 쪽에 매복시킵니다. 그리고 선봉으로 전라좌수영 수군들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고, 이순신이 광양현감 어영담에게 판옥선 5척으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유인작전을 명령합니다.
5척의 조선 판옥선이 어영담의 지휘하에 견내량으로 들어가 포를 쏘니, 와키자카 야스하루도 바로 총을 쏩니다. 이전에 용인 전투 승리로 조선인을 쉽게 보았는지, 뒤돌아보지 않고 당당하게 조선군 쪽으로 돌격합니다. 와키자카 부대가 견내량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유인 작전에 성공한 이순신은 다음 작전을 위해 기다립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도 견내량을 빠져나오는 길목에 내심 조선군의 측면 공격을 우려했으나 다행히 조선의 매복이 없음을 알고 안심합니다. 이에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하늘을 찌를듯한 자신감으로, 조선함 쪽으로 쉬지 않고 힘차게 노를 저어 무려 18km 정도를 옵니다. 노를 저어 멀리 온 왜군들은 이미 체력이 고갈되었고, 배 사이의 간격도 점점 멀어진 상태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작전상 생각한 곳까지 일본이 왔을 때, 군악 소리가 바뀌고 무언가를 알리는 징 소리가 우렁차게 납니다. 그 순간 학익진!! 조선 함대들이 학의 날개 모양으로 기가 막히게 모양을 바꿉니다. 책으로, 영화로만 그 멋진 모습을 편하게 보았지만, 실제로는 후퇴하다가 학익진을 전개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배가 넘어질 수도 있고, 학의 날개 모양이 흐트러질 수도 있는데 그 어려운 것을 해낸 조선 군사들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이 모습에 조선을 쉽게 본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무척 놀라고 당황합니다. 방화도를 넘어 조선배들이 넘어와서 학익진을 형성하고, 2척의 거북선은 돌격 앞으로!! 일본 함대의 진을 가르며 판옥선 간의 거리를 30-50m 유지합니다. 그리고 거북선 정면의 뱃머리 쪽에서 2-3개의 포가 쏘아집니다. 정면 포를 쏜 뒤, 학익진으로 형성된 배의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배의 좌측에서 포를 또 쏘아버립니다.
‘정면으로 쏘아! 좌측으로 쏘아!‘를 번갈아가며 조선군들은 전투에 온 힘을 쏟습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선을 보며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한 번 더 놀라고 어찌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일본이 진격하여 학익진 형상을 쪼개어 백병전을 전개하면 조선이 불리하므로, 거북선은 학익진의 형상을 깨려는 왜선부터 격파시킵니다.
그리고 통영 쪽에 매복하고 있던 이억기 부대도 학익진을 형성하여 포를 쏘고, 화도 쪽에 매복하고 있던 원균 7척도 왜선들을 둘러싸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조선군의 학익진으로 둘러싸여 공격당한 일본은 왜선 73척 중에 59척이 격침되고 왜군 8000 – 9000명이 수장됩니다. 이로써 한산도 해전은 한산도 대첩으로 큰 승리를 하게 됩니다.
승리를 확신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도 활을 맞아 바다에 빠졌으나 수영하여 무인도인 한산도에서 숨어 지내게 됩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앞만 달려가던 그는 결국 이순신 장군의 작전대로 무인도 한산도에 도착한 것입니다.
또한 그의 후방에 있던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마키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순신 장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노를 저어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사진으로 가던 일본 함대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고 결국 후방 함대들은 선방 함대보다 1-2km 뒤처져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 본대가 전라좌수영 함대로부터 일시집중타로 당하고 있으니, 후방 함대는 그대로 도망가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마키에게 차라리 싸우느니 바다에 빠지겠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무섭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2명의 수장들도 도망친 병사들과 함께 공포감을 느끼고, 좁은 안골포 포구로 숨어 육지에 의존해 싸울 생각을 했습니다. 안골포 해전은 한산도 대첩 설명 후 아래에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한산도 해전이 끝나고 14척의 왜선은 나포하고, 한산도 육지로 목숨을 건진 왜군들은 일부러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왜군이 숨은 이 한산도를 원균 함대 7척에 둘러싸여 지내게 됩니다. 한산도는 무인도라 그 안에서 왜군들은 굶어죽고, 실제로 어부들이 근처에 다니다가 힘없이 쓰러진 왜군의 수급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럼 헤엄쳐서 한산도로 살아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미역을 먹고 10일을 견뎌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산도를 포위하던 원균이 다른 곳에 일본 함대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벗어나는 바람에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탈출했다고 합니다.
자신감에 찬 모습으로 해전에 임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한산도 대첩에서 크게 패하고 독단적 행동에 후회를 했고, 그전과는 다르게 항상 겸손하고 조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한산도 대첩에서 패전하고 10일간 미역만 먹고살았다고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한산도 대첩으로 일본 군사 9000여 명이 전사한 큰 패전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륙 병진 정책을 포기하고 조선 수군과 교전을 완전히 금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순신 장군과 군사들의 한산도 대첩 승리로, 일본 수군들은 해전의 공포감에 휩싸이고 사기도 많이 떨어집니다.
전시에 느끼는 공포감의 전염 속도는 굉장히 빠르기에 한산도 대첩 이후 많은 공포감과 불안감으로 지냈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 이름만 들어도 겁을 먹고, 밤에 바다 먼 곳에서 고기잡이배 불빛만 보여도 조선 함대가 온다고 겁에 질려 도망 다녔다고 합니다. 전쟁 초기에 콩 볶는 소리만 듣고 조총 소리로 착각하여 겁낸 조선 백성들이었는데, 이제는 멀리 대포 소리만 들어도 왜군이 겁내고 도망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육지 전투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까지 점령하고, 선조는 명나라 국경선 의주까지 도망간 상태였습니다. 이때 한산도 대첩의 승리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선조를 살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서해를 통한 일본군의 식량, 물자 수송도 안되고, 수륙 병진 정책도 포기한 상태이므로 고니시 유키나가도 평양에서 발이 묶인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한산도대첩(1592.7.8), 진주대첩(1592.10.6), 행주대첩(1593.2.12))과 우리나라 역사상 3대 대첩(을지문덕의 살수대첩(612), 강감찬의 귀주대첩(1018), 이순신의 한산도대첩(1592)) 중 하나가 되는 역사적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1592.7.8) 한산도에서 승리(한산도 대첩)를 하고, 견내량으로 빠져나가 가조도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에 한산도에서 안골포 포구로 숨은 수장과 왜군을 무찌를 계획을 세웁니다. 밀물과 썰물의 차를 이용하기 위한 전략으로 (1592.7.9) 새벽 2시에 출발하여 아침에 안골포 앞바다에 도착합니다. 남은 왜선이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으므로 가덕도 쪽에 이억기 함선을 매복시킵니다.
안골포 앞바다는 썰물일 때 물이 완전 빠져 갯벌이 되기 때문에 공격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순신은 밀물 시각(오전 8-10시, 오후 2-4시)에 공격하려는 전략을 세웁니다. 이 시간에 원균과 군사들은 안골포 앞바다로 출격합니다.
앞서 도망간 구키 요시타카는 안골포 포구에 40여 척의 왜선을 정박시키고, 혹시나 포구까지 공격할 수 있음을 걱정하여 육지에도 포를 장착합니다. 밀물 시작 시각인 오전 8시에 이순신은 배를 장사진으로 만들어 들어가 보지만, 협소하고 거기다 방파제까지 있습니다. 이순신은 고민 끝에 2척의 판옥선만 방파제 안으로 들여보냅니다.
그리고 일본의 포가 날아오지 못하는 사정거리에서 2척의 판옥선은 멈춥니다. 왜 그곳에서 멈추었는지 너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바로 그 위치는 일본의 포 사정거리는 안 되지만, 조선의 ‘천자총통’ 사정거리는 가능한 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일본보다 먼 사정거리를 가진 조선의 무기인 ‘천자총통’을 칭찬하고 응원합니다.
이렇게 그 위치에서 2척의 판옥선은 천자총통으로 포를 쏘고, 앞으로 아닌 뒤로 돌아 나옵니다. 그 이유는 단 2척의 판옥선이 왜선에 둘러싸이지 않기 위해 포만 쏘고 뒤로 돌아 나온 것입니다. 2척의 판옥선에서 천자총통으로 포를 쏘고 뒤로 돌아 나오면, 뒤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2척의 판옥선이 다시 그 위치로 와서 천자총통으로 포를 쏩니다. 이렇게 2시간의 밀물시간 동안 천자총통의 포를 반복적으로 쏘아대고, 썰물이 되기 전에 빠져나옵니다.
너무 통쾌하지 않습니까? 상대편은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을까요? 무력뿐만 아니라 현명한 전술로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여 계획적으로 상대방을 공격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무신 출신이지만 평소에도 책을 항상 가까이하기에 이렇게 엄청난 전략이 나온 것이 아닐까요?
공격을 받던 일본도 밀물로 공격이 쉽지 않았고, 게다가 천자총통의 포로 함선들이 많이 부서진 상태라 수리하고 고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4시간 후 또다시 밀물이 시작되어 또다시 이순신 지휘로 2시간 동안 2척의 판옥선과 천자총통으로 포를 쏘고 돌아 나오기를 반복합니다.
이 작전으로 정박되어 있던 왜선 42척을 박살 내고, 이순신 함대가 안골포를 포위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키 요시타카는 남은 20여 척 배에 부하들을 태우고 새벽에 몰래 빠져나와 도망을 가는데 이때 조선의 천자총통을 훔쳐 갔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한산도 대첩에 이어 안골포 해전도 승리를 합니다.
(1592.7.10) 안골포 해전 승리 후 안골포에서 남은 왜군들이 도망가고 (1592.7.11) 좀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가 수색하지만, 한산도, 안골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바다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592.7.12) 이순신 장군과 군사들이 견내량을 빠져나와 여수로 귀항하는 길에 한산도 대첩에서 도망간 왜군들이 한산도에서 배가 고파 살려달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순신 해전 총정리!!>
3. 한산도 대첩 결과
한산도 대첩 – 안골포해전 (1592.7.8 – 1592.7.10)
조선 | 일본 | |
한산도 대첩 | 함대 피해없음 19명 사망, 116명 부상 | 59척 격침, 14척 나포 8000 – 9000명 사망 |
안골포해전 | 함대 피해없음 군사 피해없음 | 42척 격침 4000여명 사망 |
4. 한산도 대첩 특징 및 요약
-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의 3차 출정 : 한산도 대첩 – 안골포해전
- 조선시대에는 ‘견내량 해전’이라고 함
- 한산도 대첩 : 학익진 전술, 거북선 출전
- 한산도 대첩 :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 우리나라 역사상 3대 대첩 중 하나
- 안골포해전 :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 천자총통 포 쏘아대기
- 한산도 대첩, 안골포해전에서 100척 이상의 격침, 사상자 만명 이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금지령 선포 : 사실상 조선의 남해 제해권 장악
5. 그 밖의 이야기
- 한산도 대첩 후에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순신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내가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내가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내가 가장 차를 함께하고 싶은 사람도 바로 이순신이다.’
- 조선시대에는 ‘한산도’라는 지명보다 ‘견내량’이라는 지명이 더 유명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견내량 대첩’이라고 불리었으며, 임금에게도 <견내량파왜병장> 장계를 올렸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가족들과 함께 본 ‘한산’ 영화의 생생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영화를 본 후 이순신 장군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이제까지 잘 몰랐던 사실이 너무 많아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이 계기로 이순신 장군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고, 함께 응원하며 그 감동을 느끼고 싶습니다. 이 글을 통해 한산도 대첩에서 보여준 기발한 전술과 밀물, 썰물을 이용해 승리한 안골포 해전에서의 짜릿함도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